한국천문연구원이 조선 후기 천문유산인 ‘남병철 혼천의’ 복원 모델 제작에 성공했습니다.
이로써 문헌으로만 전해졌던 조선 후기 천문학자인 남병철의 혼천의가 170여 년 만에 되살아났습니다.
혼천의는 지구, 태양, 달 등 여러 천체의 움직임을 재현하고 그 위치를 측정하는 기기로 현대천문학으로 넘어오기 이전까지 표준이 된 천체관측기구인데요. 남병철 혼천의는 개별 기능으로만 활용되어온 기존 혼천의를 보완하고 관측에 편리하도록 개량한 천문기기로 천문학자 남병철(南秉哲, 1817~1863)이 집필한 ‘의기집설(儀器輯說)’의 ‘혼천의’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남병철 혼천의는 장소를 옮겨가며 천체를 관측할 수 있도록 관측의 기준이 되는 북극 고도를 조정하는 기능을 갖췄습니다. 기존 혼천의는 북극 고도를 관측지에 맞게 한번 설치하면 더 이상 변경할 수 없었죠.
남병철 혼천의의 또 다른 특징은 필요에 따라 사유권*의 축을 선택할 수 있어 고도, 방위 측정은 물론이고, 황경과 황위, 적경과 적위 등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사유권: 천체의 위치를 측정하기 위한 환으로 극축을 중심으로 적도 방향(동서 방향)으로 운행한다.
남병철은 가장 안쪽 고리(사유권)의 회전축을 두 번째 안쪽 고리(재극권)에 있는 3종류의 축인 적극축, 황극축, 천정축을 연결해 상황에 맞는 천체 관측이 가능하도록 혼천의 기능을 더욱 확장했습니다. 예를 들어 축을 적극축에 연결하면 지구의 회전축을 중심으로 천체의 위치를 표현해 적경과 적위를 측정하며, 황극축에 고정할 경우 태양의 운동을 기준 삼아 사용되는 황도좌표계의 황경과 황위를 측정할 수 있습니다. 천정축에 연결하면 고도와 방위 측정이 가능합니다. 즉 남병철 혼천의는 기존 세 종류의 혼천의가 하나로 합쳐진 것인데요.
남병철 혼천의에 관한 연구는 한국천문연구원 김상혁 책임연구원이 20년 전에 시작했으며, 2022년부터 한국천문연구원 민병희 책임연구원, 국립과천과학관의 남경욱 연구관 등 연구팀을 구성해 본격적인 복원을 진행했습니다.
연구팀은 과학기술적 관점에서 ‘의기집설’의 내용을 다시 번역해 기초 설계를 진행했으며, 충북Pro메이커센터 및 전문 제작 기관과 협업해 남병철 혼천의 모델 재현에 성공했습니다. 이번 복원을 주도한 고천문연구센터 김상혁 책임연구원은 "남병철의 혼천의는 전통 혼천의 중에서 실제로 천체 관측이 가능하도록 재극권을 탑재한 세계 유일의 과학기기다. 과거의 천문기기를 복원함으로써 당시의 천문관측 수준을 이해하며 천문 기록의 신뢰도를 높일 수 있고, 우리 선조의 우수한 과학문화재를 되살릴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밝혔습니다.
남병철 혼천의는 올해 하반기에 국립과천과학관에서 특별 전시될 예정입니다.
남병철의 혼천의
혼천의에는 천체의 움직임을 알려 주는 많은 고리들이 달려 있는데, 남병철의 혼천의는 크게 5개의 층으로 구성됩니다. 가장 바깥을 이루고 있는 외환에는 지평권을 두었습니다. 그 안쪽에는 육합의를 두었는데, 육합의는 자오권과 천상적도권이 포함됩니다. 그 다음 안쪽에는 삼신의를 두었습니다.
삼신의는 삼신권, 유선적도권, 황도권으로 이루어졌는데요. 그 다음은 재극권을 두었습니다. 재극권을 통해 극축을 3가지로 구분해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재극권 안쪽에는 사유의를 두었는데, 사유의는 사유권, 직거, 규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규형은 천체를 조준하는 역할을 하는데, 여기에 통광표, 측성표 등의 관측표를 장착하여 천체를 관측했습니다.
남병철 혼천의 주요 구성과 역할
육합의: 하늘의 둥근 모양을 표현하는데, 자오권과 천상적도권으로 구성되며 고정되어 있다.
1. 자오권: 지평권의 남북 방향을 통과하는 환이다.
2. 천상적도권: 천구상에 적도를 표현하는데, 자오권과 결합되어 있다.
삼신의: 해, 달, 별을 의미하는데, 삼신권, 황도권, 유선적도권으로 구성되며 극축을 따라 회전한다.
3. 삼신권은 황도권과 유선적도권과 결합되어 있다.
4. 황도권은 태양이 운행하는 환으로 유선적도권과 23.5°어긋나게 결합되어 있다.
5. 유선적도권은 천상적도권 안쪽에 위치한 환으로 천구상 별의 운행을 나타내는 환이다.
사유의: 혼천의의 가장 안쪽에 위치하며 극축을 중심으로 회전한다. 천체의 위치를 관측하는 사유권과 규형이 있다.
6. 사유권: 천체의 위치를 측정하기 위한 환으로 극축을 중심으로 적도 방향(동서 방향)으로 운행한다.
7. 규형: 사유권 측면에 부착하여 위 아래(남북 방향)로 움직여 천체를 관측한다.
8. 지평권: 지평을 나타내며, 24방향을 나타낸다. 자오권과 천상적도권과 결합한다.
9. 재극권: 삼신의와 사유의 사이에 위치하며, 재극권에 적극, 황극, 천정극을 두어 좌표계를 변환할 수 있다.
혼천의로 천체를 관측하려면 가장 먼저 혼천의를 수평으로 설치하고 회전축이 적극축과 일치하도록 조정합니다. 다음으로 삼신의를 동서 방향으로 돌려서 하늘의 모습과 일치시킨 후, 사유의를 돌려서 관측하려는 천체 방향으로 규형을 향하게 하여 그 천체를 겨눈 후, 사유권 눈금과 삼신의 적도권 눈금을 읽어 천체의 위치를 알 수 있습니다.
남병철의 의기집설
의기집설(儀器輯說)은 1850년대 후반 사대부 천문학자 남병철이 편찬한 책으로, 천문의기의 제작법과 사용법을 다루고 있습니다. 각종 천문의기(天文儀器)의 논설[說]을 모아서 만들었다[輯]는 책 제목의 의미처럼, 이 책에는 10가지 천문의기의 제작법과 사용법이 정리되어 있는데요. 이 책은 동아시아에서 그동안 제작되었던 혼천의 역사를 정리하고, 새로운 혼천의를 제작법과 사용법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남병철(南秉哲, 1817~1863)은 19세기 중반에 활약했던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문인입니다. 그는 1837년(헌종 3) 21살의 나이로 관직에 나아가 1856년(철종 7) 39세부터 정2품인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시작으로 육조의 판서를 지내고 의정부(議政府) 좌참찬(左參贊), 규장각(奎章閣) 제학(提學), 대제학(大提學) 등을 거쳤습니다. 정2품의 관직을 두루 맡는 시기에 관상감(觀象監) 제조(提調)도 겸임했습니다. 관상감은 조선시대 천문학을 다루던 관서로 오늘날의 한국천문연구원에 해당합니다.